이내, INAE
붓과 귀
창작

<붓과 귀> 전문 바로가기

 

 

2019년, 대학원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나서 쓴 글이다. 

 

시작은 오로지 도입부만 믿고 한 거였다. 

7월 17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에 나는 가로수에 걸린 태극기를 따라 다시 서울로 왔다. 내가 가지고 온 것은 전세 보증금과 옷, 그리고 책 두 권이 전부였다. 혼자 살기에 넓었던 집은 모든 것이 옵션이라 가지고 나올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챙겨 살지 않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심했다는 건 짐을 빼면서 알게 되었다.

 

상경하는 입장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반대가 되는 지역을 그려야 했다. 나는 내가 가봤던 곳 중에서, 차로 가기에 가장 힘들었던 '순천'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공간적으로는 '서울↔순천'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서울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천에서 무엇인가를 잃어야했다. 직업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직업은 상담사로 결정했다. 자의로 잃는 것보다 타의로 잃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한다. 그래서 결국 타의로 잃은 것도 자신의 선택에서 파생된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만심, 사명감, 오만, 만용 같은 단어들을 골라 주인공에게 넣어주었다. 비로소 주인공이 다른 인물을 상대할 때 대하는 태도가 만들어졌다.

 

주인공 정규진의 상대는 이지수이다. 이지수는 남자로 무던하고 장난기 있는 성격이지만, 자신의 일이나 남의 일이나 할 것 없이 늘 힘을 내서 대한다. 자존감이 높은 정규진이 사명감을 잃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만나는 이지수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대화를 어떻게 그려야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나는 수묵담채화를 결정했다. 그때 한창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인터넷을 뒤졌는데, 수묵담채화 경매 뉴스가 네이버에 올라왔다. 그래서 이지수의 직업은 수묵담채화와 관련된 것으로 골랐다.

 

이 글을 다 쓰고 났을때, 결말 부분에서만큼은 피어 피드백에서 큰 말이 없었다.

화선지를 가로지르는 굵고 갈라진 기둥 같은 큰 가지 위에 잔가지가 붕 뜬 채로 자리를 잡고 있고, 또 아무 데나 튄 점들이 있던 곳에는 이지수가 한 잎씩 그려 얹은 꽃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지수의 손에서 끊임없이 한 송이씩 피는 꽃을 보다가 뒤를 돌아 화방을 나왔다. 그냥 오늘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정규진은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고, 이지수는 그것을 완성한다. 그것도 정규진과 이지수가 공유했던 공간에서. 그림이 완성되고, 정규진은 그대로 화방을 떠난다.


이 당시 글을 쓸 때는 한주에 4페이지-4페이지-4페이지씩 해서 12페이지의 글을 완성했다. 피드백을 받으면서 작성을 하니 앞으로의 전개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글을 쓰니, 방향성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간만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그 전에 썼던 <나의 너에게>는 연애 소설이라서 내가 쓰기에는 다소 간지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사명감을 테마로 한 글은 너무 익숙했다. 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것 같았다. 그 뒤로 사명감을 주제로 글을 여러 편 썼는데, 꼭 사명감을 이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뒤로 몇 편의 글이 나왔지만, 모두 이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좌절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다들 많이 늘었다고 해줬다. 그나마 다행인걸까. 하나씩 복기하다보면 내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제목은 작가님이 지어줬다. 붓은 이지수를, 귀는 정규진을 상징한다. 그림을 그리는 이지수,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규진. 글을 다 쓰고 '그냥 오늘은' 이라고 제목을 썼다가 호되게 혼났던 생각을 다시금 해보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ㅎㅎ)

 

요즘 정말로 이상하게 가수 홍이삭 님 생각이 많이 난다. 어떤 심정으로 복기를 하는 걸까? 궁금해진다. 단순히 생각했던 것, 경험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만 글을 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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